속으로 배어들다
송재원 (Song Jaewon 에듀케이터)
1. 지붕을 머리에 인 소년
발가벗은 소년이 두 손으로 자신의 벗겨진 몸을 가리는 대신 머리에 인 지붕을 단단히 받치고 앞으로 나아간다. 개의 형상을 한 유령 한 마리와 함께. 이 작품의 제목은 〈나는 어디에 살 것인가〉(2017)이다. 이후로도 이 작은 소년은 작가의 몸으로 예술가들에게 제공되는 레지던시를 임시 거처로 삼아 대만, 원주, 순천, 양구를 전전했다. 짧게는 2개월, 길게는 1년을 머무는 동안에도 결국엔 떠나야 한다는 불안에 소년은 머리에 인 지붕을 내려놓지 않았다.
대부분 도시로부터 떨어진 자연에 위치한 레지던시에서 작가 송신규는 자연스레 생태계와 교제하며 자신의 감각기능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이면에 인간 사회로부터 단절된 시간 속에서 지난 삶의 파편들을 곱씹으며 기억의 날을 갈았고, 그 예리한 날로 캔버스 위에 자신의 역사를 기록해왔다. 오랜 시간 작가의 정신을 지배해온 모성의 부재와 가족의 단절, 훼손된 유년기 그리고 이에 기인하여 그 어느 곳에도 적을 두지 못하는 자아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갈망. 나는 작품 속 차갑게 마른 대지(大地)와 자연에서 모성에 대한 부재와 그리움을, 무너진 건축물과 앙상한 골조에서 그의 단절된 가족사를 엿보곤 하였는데, 이런 점에서 자연은 작가에게 거대하고 순수한 위로임과 동시에 형용할 수 없는 내면의 깊은 고독과 상실감을 은유하는 이중적 메타포임을 느낄 수 있다.
“사물의 표면적인 질감과 역동적인 선을 찢고 꿰매고 긁고 붙이고 칠하는 행위로 표현했다. 그것은 소외된 생물에 내포한 상처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내식대로의 신음이었다.”
2020년 개인전 《자연으로 돌아가다》에서 송신규는 작가노트를 통해 위와 같이 서술했다. 이후 양구 레지던시에서 올린 《인간과 고향》(2022)에서 작가의 신음은 절정에 다다른다. 어둡고 음습한 풍경 안에 말라버린 뿌리와 앙상한 가지가 캔버스를 뚫고 나올 듯 전방(全方)으로 뻗어 나간다. 그 안엔 격렬하고 파괴적인 힘이 내재 되어있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 죽어야만 하는 시간, 겨울. 캔버스 안에서 긁히고 찢기면서도 소멸을 거부하는 소외된 생물들처럼, 작가도 자신의 소멸을 막기 위해 지나간 기억을 끄집어내어 찢고 꿰매고 긁고 붙이기를 반복했다. 자연에서 내면의 결핍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그로 인해 상처는 상흔이 될 시간을 얻지 못했다. 이 시기의 작품에서는 원초적인 힘 이면에 순수한 고통과 서글픔이 느껴진다. 영혼마저 자취를 감춘 한겨울 빈터에 현재진행형의 과거 속에 사는 벌거벗은 소년이 불온전한 자아와 의식(意識)의 소멸을 거부하며 기억이란 이름의 망령을 태우고 있다.
2. 기억이 그을린 자리에 번져나가는
춘천예술촌 작업실에서 오랜만에 마주 앉은 작가 송신규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본다. 무엇이 달라진 걸까. 왜인지 그에게서 편안한 기운이 감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일까? 그러나 작가는 물론 그와 함께 유년시절을 보낸 나에게도 춘천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고향’이라는 단어만큼 따뜻한 곳을 의미하진 않는다. 작가가 풍기는 새로운 기운에 대한 미스터리를 가진 채 그의 작품을 보았다. 첫인상은 ‘의외’였다. 공중에서 하늘거리는 송신규의 이번 작품들에선 지난날의 개인전 《분리된 다리》(2019), 《자연으로 돌아가다》(2020), 《인간과 자연: 화해》(2020), 《풍경의 뼈, 기억의 땅》(2021), 《인간과 고향》(2022)을 통해 보여준 작가의 기억과 자연을 모태로 한 작품들과는 다른 양상이 보였다. 돌고 돌아 그의 정신과 작품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기억의 발생지로 돌아왔음에도 작가는 이에 대한 레퍼토리를 복기하지 않았다. 올해 초 춘천으로 돌아온 이후 작가는 작품에 집중하기 어려울 정도로 몸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지친 하루의 끝에 전신에 힘이 빠진 채로 최소한의 에너지를 빈천에 실을 수밖에 없었다고. 그래서일까. 익숙하지 않은 대신 어딘가 더 가벼워진 에너지가 느껴진다.
올해 춘천으로 돌아와서 연 개인전 《오랫동안 잊혀진》(2022)을 시작으로 작가 송신규의 세계관 안에 또 하나의 문이 열렸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미생물〉 연작엔 작가가 자연에서 축적해온 형상들이 녹아들어 있다. 식물의 포자와 나무의 표피, 투명한 망에 싸인 개구리알, 이끼, 빈껍데기, 벌집, 잎사귀 등과 같은 자연의 부산물이 세포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고, 사그라지는 생명과 피어나는 생명이 중첩되어 평면의 차원을 넘어 퍼져나간다. 흘러가는 물과 축축한 토양, 바람길과 같이 그 모든 생명을 이으며 순환하는 기운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분명 새로운 이야기다. 작품에 새로운 서사가 생겼다는 것은 작가의 관점 혹은 태도가 변화했음을 암시한다. 과거의 정체된 일상이 작가를 기억의 심연으로 끌어들였던 것처럼 현재의 숨 가뿐 일상이 그를 무의식으로 이끌었고, 그 과정에서 작가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수용 도구 또한 예리한 의식에서 확장된 감각으로 이동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지난겨울 작가의 《인간과 고향》(2022)에 응집된 에너지가 거칠게 뻗어 나가는 형태가 있었다면, 그해 가을 《오랫동안 잊혀진》(2022)에는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퍼져나가는 형상이 있다. 단순히 ‘전시’를 기준으로 바라보면 같은 해에 벌어진 갑작스러운 변화이지만, ‘인간 송신규’를 기준으로 보면 십여 년의 지독한 혹한기를 버텨낸 성장이다.
송신규는 주로 자연의 부산물의 표면을 연필로 문질러 대상의 질감을 종이에 기록하는 프로타주 방식으로 자연을 수집해왔다. 이는 동시에 작가가 정신이 아닌 육신으로 자연을 감각(感覺)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가 사계절을 의식(儀式) 혹은 고행과 같이 반복한 이 일상적인 행위를 통해 자연의 결이 작가 송신규의 속으로 서서히 배어들었다. 《속으로 배어들다》(2023)는 그가 아닌 그의 몸이 기억하는 자연의 결들을 보여주는 전시이다. 자연에서의 시간 속에서 작가가 감각 해온 근원적인 기운이 사방으로 번져나간다. 그제야 그가 풍기는 한결 편안해진 기운의 원천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는 이번 〈미생물〉 연작에서도 ‘상실’을 그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본작에서의 상실은 그동안 작가를 유령처럼 따라다녔던 고통과 절망의 상실이 아닌 ‘소생’을 위한 상실이다. 미생물은 소생과 탄생의 양분이 된다. 작가 송신규는 이미 오랫동안 자신에게 끈적하게 달라붙은 기억을 태워 작품을 그렸다. 이제 그 기억이 그을린 자리에 미생물이 자라고 새로운 이야기가 태동하고 있다.
이 글을 마치기 전, 다시 한번 송신규의 작업실을 방문하여 현재 초벌과정 중인 캔버스를 보았다. 색을 입은 형상으로부터 신비한 파장이 느껴진다. 물론 그 안에는 작가가 오랫동안 축적해온 기억의 형상도 한층 미세해진 모습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며 파생되고 있다. 감각과 의식의 신비로운 혼재와 기억 안에서 또 다른 리듬으로 변주(變奏)하는 기억. 이 아름답고 변화무쌍한 여정의 동행은 작가 송신규를 길잡이로 만났을 때 가능하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작가는 묵묵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연구해나가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세계관을 넓혀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초대된 우리는 그의 역동적인 세계를 통해 굳어진 감각을 녹이고 한층 확장된 사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송재원 (Song Jaewon 에듀케이터)
1. 지붕을 머리에 인 소년
발가벗은 소년이 두 손으로 자신의 벗겨진 몸을 가리는 대신 머리에 인 지붕을 단단히 받치고 앞으로 나아간다. 개의 형상을 한 유령 한 마리와 함께. 이 작품의 제목은 〈나는 어디에 살 것인가〉(2017)이다. 이후로도 이 작은 소년은 작가의 몸으로 예술가들에게 제공되는 레지던시를 임시 거처로 삼아 대만, 원주, 순천, 양구를 전전했다. 짧게는 2개월, 길게는 1년을 머무는 동안에도 결국엔 떠나야 한다는 불안에 소년은 머리에 인 지붕을 내려놓지 않았다.
대부분 도시로부터 떨어진 자연에 위치한 레지던시에서 작가 송신규는 자연스레 생태계와 교제하며 자신의 감각기능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이면에 인간 사회로부터 단절된 시간 속에서 지난 삶의 파편들을 곱씹으며 기억의 날을 갈았고, 그 예리한 날로 캔버스 위에 자신의 역사를 기록해왔다. 오랜 시간 작가의 정신을 지배해온 모성의 부재와 가족의 단절, 훼손된 유년기 그리고 이에 기인하여 그 어느 곳에도 적을 두지 못하는 자아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갈망. 나는 작품 속 차갑게 마른 대지(大地)와 자연에서 모성에 대한 부재와 그리움을, 무너진 건축물과 앙상한 골조에서 그의 단절된 가족사를 엿보곤 하였는데, 이런 점에서 자연은 작가에게 거대하고 순수한 위로임과 동시에 형용할 수 없는 내면의 깊은 고독과 상실감을 은유하는 이중적 메타포임을 느낄 수 있다.
“사물의 표면적인 질감과 역동적인 선을 찢고 꿰매고 긁고 붙이고 칠하는 행위로 표현했다. 그것은 소외된 생물에 내포한 상처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내식대로의 신음이었다.”
2020년 개인전 《자연으로 돌아가다》에서 송신규는 작가노트를 통해 위와 같이 서술했다. 이후 양구 레지던시에서 올린 《인간과 고향》(2022)에서 작가의 신음은 절정에 다다른다. 어둡고 음습한 풍경 안에 말라버린 뿌리와 앙상한 가지가 캔버스를 뚫고 나올 듯 전방(全方)으로 뻗어 나간다. 그 안엔 격렬하고 파괴적인 힘이 내재 되어있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 죽어야만 하는 시간, 겨울. 캔버스 안에서 긁히고 찢기면서도 소멸을 거부하는 소외된 생물들처럼, 작가도 자신의 소멸을 막기 위해 지나간 기억을 끄집어내어 찢고 꿰매고 긁고 붙이기를 반복했다. 자연에서 내면의 결핍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그로 인해 상처는 상흔이 될 시간을 얻지 못했다. 이 시기의 작품에서는 원초적인 힘 이면에 순수한 고통과 서글픔이 느껴진다. 영혼마저 자취를 감춘 한겨울 빈터에 현재진행형의 과거 속에 사는 벌거벗은 소년이 불온전한 자아와 의식(意識)의 소멸을 거부하며 기억이란 이름의 망령을 태우고 있다.
2. 기억이 그을린 자리에 번져나가는
춘천예술촌 작업실에서 오랜만에 마주 앉은 작가 송신규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본다. 무엇이 달라진 걸까. 왜인지 그에게서 편안한 기운이 감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일까? 그러나 작가는 물론 그와 함께 유년시절을 보낸 나에게도 춘천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고향’이라는 단어만큼 따뜻한 곳을 의미하진 않는다. 작가가 풍기는 새로운 기운에 대한 미스터리를 가진 채 그의 작품을 보았다. 첫인상은 ‘의외’였다. 공중에서 하늘거리는 송신규의 이번 작품들에선 지난날의 개인전 《분리된 다리》(2019), 《자연으로 돌아가다》(2020), 《인간과 자연: 화해》(2020), 《풍경의 뼈, 기억의 땅》(2021), 《인간과 고향》(2022)을 통해 보여준 작가의 기억과 자연을 모태로 한 작품들과는 다른 양상이 보였다. 돌고 돌아 그의 정신과 작품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기억의 발생지로 돌아왔음에도 작가는 이에 대한 레퍼토리를 복기하지 않았다. 올해 초 춘천으로 돌아온 이후 작가는 작품에 집중하기 어려울 정도로 몸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지친 하루의 끝에 전신에 힘이 빠진 채로 최소한의 에너지를 빈천에 실을 수밖에 없었다고. 그래서일까. 익숙하지 않은 대신 어딘가 더 가벼워진 에너지가 느껴진다.
올해 춘천으로 돌아와서 연 개인전 《오랫동안 잊혀진》(2022)을 시작으로 작가 송신규의 세계관 안에 또 하나의 문이 열렸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미생물〉 연작엔 작가가 자연에서 축적해온 형상들이 녹아들어 있다. 식물의 포자와 나무의 표피, 투명한 망에 싸인 개구리알, 이끼, 빈껍데기, 벌집, 잎사귀 등과 같은 자연의 부산물이 세포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고, 사그라지는 생명과 피어나는 생명이 중첩되어 평면의 차원을 넘어 퍼져나간다. 흘러가는 물과 축축한 토양, 바람길과 같이 그 모든 생명을 이으며 순환하는 기운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분명 새로운 이야기다. 작품에 새로운 서사가 생겼다는 것은 작가의 관점 혹은 태도가 변화했음을 암시한다. 과거의 정체된 일상이 작가를 기억의 심연으로 끌어들였던 것처럼 현재의 숨 가뿐 일상이 그를 무의식으로 이끌었고, 그 과정에서 작가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수용 도구 또한 예리한 의식에서 확장된 감각으로 이동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지난겨울 작가의 《인간과 고향》(2022)에 응집된 에너지가 거칠게 뻗어 나가는 형태가 있었다면, 그해 가을 《오랫동안 잊혀진》(2022)에는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퍼져나가는 형상이 있다. 단순히 ‘전시’를 기준으로 바라보면 같은 해에 벌어진 갑작스러운 변화이지만, ‘인간 송신규’를 기준으로 보면 십여 년의 지독한 혹한기를 버텨낸 성장이다.
송신규는 주로 자연의 부산물의 표면을 연필로 문질러 대상의 질감을 종이에 기록하는 프로타주 방식으로 자연을 수집해왔다. 이는 동시에 작가가 정신이 아닌 육신으로 자연을 감각(感覺)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가 사계절을 의식(儀式) 혹은 고행과 같이 반복한 이 일상적인 행위를 통해 자연의 결이 작가 송신규의 속으로 서서히 배어들었다. 《속으로 배어들다》(2023)는 그가 아닌 그의 몸이 기억하는 자연의 결들을 보여주는 전시이다. 자연에서의 시간 속에서 작가가 감각 해온 근원적인 기운이 사방으로 번져나간다. 그제야 그가 풍기는 한결 편안해진 기운의 원천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는 이번 〈미생물〉 연작에서도 ‘상실’을 그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본작에서의 상실은 그동안 작가를 유령처럼 따라다녔던 고통과 절망의 상실이 아닌 ‘소생’을 위한 상실이다. 미생물은 소생과 탄생의 양분이 된다. 작가 송신규는 이미 오랫동안 자신에게 끈적하게 달라붙은 기억을 태워 작품을 그렸다. 이제 그 기억이 그을린 자리에 미생물이 자라고 새로운 이야기가 태동하고 있다.
이 글을 마치기 전, 다시 한번 송신규의 작업실을 방문하여 현재 초벌과정 중인 캔버스를 보았다. 색을 입은 형상으로부터 신비한 파장이 느껴진다. 물론 그 안에는 작가가 오랫동안 축적해온 기억의 형상도 한층 미세해진 모습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며 파생되고 있다. 감각과 의식의 신비로운 혼재와 기억 안에서 또 다른 리듬으로 변주(變奏)하는 기억. 이 아름답고 변화무쌍한 여정의 동행은 작가 송신규를 길잡이로 만났을 때 가능하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작가는 묵묵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연구해나가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세계관을 넓혀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초대된 우리는 그의 역동적인 세계를 통해 굳어진 감각을 녹이고 한층 확장된 사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