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디에서 살것인가
전그륜 (Jeon Geuryun, 합정지구 큐레이터)
송신규는 비어 있는 상태를 오랜 시간 그려왔다. 뼈대만 남은 울타리나(<빈 울타리>(2017)) 밀짚으로 겨우 만든 터를 발견하고 (<나무 위에 걸쳐진 거처>(2017)) 몸통이 굵은 나무가 아무렇게나 버려진 풍경 같은 것을 그렸다.(<버려진 풍경>(2021)) 비어 있고 버려지고 겨우 버티는 이 풍경은 자꾸만 흩어지고 형체를 잃어버리다 발 디딜 땅이 무너진다. 그러니 아마도 달팽이 껍질도 필연적으로 비어 있을 것이다. <나는 어디에서 살 것인가>(2013)에는 <나무 위에 걸쳐진 거처>의 지붕을 들고 떠나는 사람과 동물이 등장한다. 이것만 있다면 집이 될 수 있다는 듯 지붕을 이고 간다. 하지만 우리는 지붕이 집을 구성하는 최소 요건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다. 집을 구성하는 조건은 지붕이나 벽, 창문 함께하는 생명 같은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얻는 안정감이다. 작가는 그곳이 어디든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며 폐혀가 된 풍경에 연민을 느끼고 거처를 찾아 헤매는 존재들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런 작가가 최근 비어 있던 자리를 채워 나가고 있다. <축적의 시간>(2023)에는 짧고 굵게 끊어지거나 날카로운 도구로 긁어낸 선과 유연하게 흐르는 선이 지난다. 곳곳에는 작은 동그라미가 밀집해 있다. 그것이 다 무엇인지 명명해 보려 하지만 여러 색과 선이 교차하고 엉키고 쌓이고 덮이는 탓에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 구멍이 가득 들어차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이 구멍이 나무 밑동이라 말했다. 그는 오래전 몸이 잘려 나가고 겨우 밑동만 남은 이것을 버려진 것, 썩어서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그린다. <축적의 시간>은 앞서 본 <버려진 풍경>의 나무와 대조된다.
<잡초>(2023)에는 그가 맞고 있는 변화가 더 선명하게 보인다. 이 풀들은 무성하게 자란다. 끊어내듯 그린 단단한 선으로 이루어진 잡초는 화면 가득 뻗어 나가며 자신이 가진 생명력을 자랑한다. 아마도 잡초를 반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만큼 자란 잡초라면 분명 인적이 드문 곳, 버려진 땅에서 자란 풀일 것이다. 이전의 그라면 어디에서도 환영 받지 못하고 쉽게 뽑혀 나가는 풀에, 또는 고립된 곳에서 자라는 이 풀에 자신을 투영하며 황폐하고 쓸쓸하게 그렸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더이상 그와 같이 묘사하지 않는다. 잡초는 뿌리 내렸고 대지는 기꺼이 그것에게 양분을 내어주기 때문이다. 송신규는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쌓여 가는 것, 홀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의지하는 풍경을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4월 일기>(2021)에 이르러 비어 있는 울타리가 사실은 감싸 안는 모양이라는 것을 자각한다. 작가는 생명이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가고 대지가 언제나 자신에게 자리를 내어준다는 사실에 위안과 따뜻함을 얻는다. 그리고 비로소 관계 안에서 자신이 머물 땅을 찾고자 한다.
합정지구는 이 전시를 위해 춘천에 있는 작가의 작업실에 방문했다. 그리고 신작과 구작을 함께 전시하기를 제안했다. 그는 비교적 신진인 자신이 구작을 전시하는 것에 부담을 가졌지만 우리는 긴 시간 하나의 질문을 고집스럽고 집요하게 물어온 그가 잘 보이기를 바랐다. 그런 관점에서 함께 선별했고 지하를 드로잉으로 가득 채우기로 하였다. 1층에는 최근 변화된 양상, 그가 새로이 옮겨간 터가 분명히 드러난다면 드로잉에는 캔버스를 벗어났을 때 얻는 자유로움과 경쾌함이 돋보인다. 소, 땅, 울타리, 뼈대, 집 등과 같이 오랫동안 유화에 등장시켰던 소재도 보인다. 긴 시간 일기를 쓰듯 그린 만큼 그의 드로잉을 찬찬히 보면 잃어버린 터에 대한 무한한 그리움부터 땅에 대한 안락함까지 그가 겪은 마음의 변화를 볼 수 있다.
송신규는 자신의 그림을 두고 반복해서 자화상이라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 ‘자기 자신에서 시작하지 않은 예술이 어디 있을까. 자신이 담겨 있지 않은 예술이 과연 있을까.’하는 근원적인 의문이 들어 작가와의 미팅에서 물었지만 그럼에도 작가는 자화상이란 단어를 누차 강조했다. 그에게 이 점이 중요한 이유는 그림에서 자신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그의 고민과 염원을 아낌없이 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십여 년간의 작업을 압축적으로 보이는 이번 전시에는 답을 찾아 헤매는 작가와 그만의 답을 찾은 작가가 분명히 보인다. 그간 작가는 머물 곳을 찾아 다녔지만 이제 그는 자신이 서있는 곳이 집이라는 점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의 경계를 확장해 나간다. 텅 비어 있는 터에서 발 딛고 서 있는 땅으로, 자기 내면에서 타자와의 관계로, 방랑에서 정착으로. 집을 사방으로 키워 나간다.
전그륜 (Jeon Geuryun, 합정지구 큐레이터)
송신규는 비어 있는 상태를 오랜 시간 그려왔다. 뼈대만 남은 울타리나(<빈 울타리>(2017)) 밀짚으로 겨우 만든 터를 발견하고 (<나무 위에 걸쳐진 거처>(2017)) 몸통이 굵은 나무가 아무렇게나 버려진 풍경 같은 것을 그렸다.(<버려진 풍경>(2021)) 비어 있고 버려지고 겨우 버티는 이 풍경은 자꾸만 흩어지고 형체를 잃어버리다 발 디딜 땅이 무너진다. 그러니 아마도 달팽이 껍질도 필연적으로 비어 있을 것이다. <나는 어디에서 살 것인가>(2013)에는 <나무 위에 걸쳐진 거처>의 지붕을 들고 떠나는 사람과 동물이 등장한다. 이것만 있다면 집이 될 수 있다는 듯 지붕을 이고 간다. 하지만 우리는 지붕이 집을 구성하는 최소 요건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다. 집을 구성하는 조건은 지붕이나 벽, 창문 함께하는 생명 같은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얻는 안정감이다. 작가는 그곳이 어디든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며 폐혀가 된 풍경에 연민을 느끼고 거처를 찾아 헤매는 존재들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런 작가가 최근 비어 있던 자리를 채워 나가고 있다. <축적의 시간>(2023)에는 짧고 굵게 끊어지거나 날카로운 도구로 긁어낸 선과 유연하게 흐르는 선이 지난다. 곳곳에는 작은 동그라미가 밀집해 있다. 그것이 다 무엇인지 명명해 보려 하지만 여러 색과 선이 교차하고 엉키고 쌓이고 덮이는 탓에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 구멍이 가득 들어차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이 구멍이 나무 밑동이라 말했다. 그는 오래전 몸이 잘려 나가고 겨우 밑동만 남은 이것을 버려진 것, 썩어서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그린다. <축적의 시간>은 앞서 본 <버려진 풍경>의 나무와 대조된다.
<잡초>(2023)에는 그가 맞고 있는 변화가 더 선명하게 보인다. 이 풀들은 무성하게 자란다. 끊어내듯 그린 단단한 선으로 이루어진 잡초는 화면 가득 뻗어 나가며 자신이 가진 생명력을 자랑한다. 아마도 잡초를 반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만큼 자란 잡초라면 분명 인적이 드문 곳, 버려진 땅에서 자란 풀일 것이다. 이전의 그라면 어디에서도 환영 받지 못하고 쉽게 뽑혀 나가는 풀에, 또는 고립된 곳에서 자라는 이 풀에 자신을 투영하며 황폐하고 쓸쓸하게 그렸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더이상 그와 같이 묘사하지 않는다. 잡초는 뿌리 내렸고 대지는 기꺼이 그것에게 양분을 내어주기 때문이다. 송신규는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쌓여 가는 것, 홀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의지하는 풍경을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4월 일기>(2021)에 이르러 비어 있는 울타리가 사실은 감싸 안는 모양이라는 것을 자각한다. 작가는 생명이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가고 대지가 언제나 자신에게 자리를 내어준다는 사실에 위안과 따뜻함을 얻는다. 그리고 비로소 관계 안에서 자신이 머물 땅을 찾고자 한다.
합정지구는 이 전시를 위해 춘천에 있는 작가의 작업실에 방문했다. 그리고 신작과 구작을 함께 전시하기를 제안했다. 그는 비교적 신진인 자신이 구작을 전시하는 것에 부담을 가졌지만 우리는 긴 시간 하나의 질문을 고집스럽고 집요하게 물어온 그가 잘 보이기를 바랐다. 그런 관점에서 함께 선별했고 지하를 드로잉으로 가득 채우기로 하였다. 1층에는 최근 변화된 양상, 그가 새로이 옮겨간 터가 분명히 드러난다면 드로잉에는 캔버스를 벗어났을 때 얻는 자유로움과 경쾌함이 돋보인다. 소, 땅, 울타리, 뼈대, 집 등과 같이 오랫동안 유화에 등장시켰던 소재도 보인다. 긴 시간 일기를 쓰듯 그린 만큼 그의 드로잉을 찬찬히 보면 잃어버린 터에 대한 무한한 그리움부터 땅에 대한 안락함까지 그가 겪은 마음의 변화를 볼 수 있다.
송신규는 자신의 그림을 두고 반복해서 자화상이라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 ‘자기 자신에서 시작하지 않은 예술이 어디 있을까. 자신이 담겨 있지 않은 예술이 과연 있을까.’하는 근원적인 의문이 들어 작가와의 미팅에서 물었지만 그럼에도 작가는 자화상이란 단어를 누차 강조했다. 그에게 이 점이 중요한 이유는 그림에서 자신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그의 고민과 염원을 아낌없이 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십여 년간의 작업을 압축적으로 보이는 이번 전시에는 답을 찾아 헤매는 작가와 그만의 답을 찾은 작가가 분명히 보인다. 그간 작가는 머물 곳을 찾아 다녔지만 이제 그는 자신이 서있는 곳이 집이라는 점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의 경계를 확장해 나간다. 텅 비어 있는 터에서 발 딛고 서 있는 땅으로, 자기 내면에서 타자와의 관계로, 방랑에서 정착으로. 집을 사방으로 키워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