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신규의 설치회화
기억의 집, 그러므로 어쩌면 정체성의 집을 짓는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비평)
여기에 바퀴가 달려있어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세로로 곧추선 봉 위에 사방으로 전개된 가로대가 가설된 설치물이 있다. 일종의 거치대를 생각하면 되겠다. 가로대에는 그 이면이 훤히 비쳐 보이는 고운 망사로 직조된 천이 위에서 아래로 길게 드리워져 있어서 불어오는 바람에 반응하며 하늘거린다. 깃발의 변형된 형태 같기도 하고, 모빌에서 착상된 유기적 구조물 같다고 해야 할까. 반투명한 하얀 망사 때문이기도 하겠고, 바람에 반응하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천의 움직임이 몽환적인 느낌을 준다. 바람에 파르르 떠는 하얀 천이며, 바람결에 반응하는 꿈결 같은 생각을 해 보게 된다. 꿈의 집이며, 기억의 통로 같은 생각을 해 보게도 된다.
그리고 작가는 하늘거리는 하얀 천 위에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그린 종이를 오려 붙였다. 그림을 그렸다고는 하나, 알만한 형상보다는 먹물을 흩뿌려 알 수 없는 비정형의 얼룩을 그렸다. 흩뿌린 먹물이 튀겨나가면서 정착된 흔적을 그리고, 천 위로 한껏 번져나가다가 맺힌 먹물 자국을 그렸다. 자국과 흔적과 얼룩을 그린 그림일까. 그런데, 무슨 자국? 무엇의 흔적? 어떤 얼룩? 자국을, 흔적을, 얼룩을 만든 원인(숨겨진 의미)이 있을 것이다. 그 원인, 그러므로 그 숨겨진 의미를 밝히는 일이 곧 작가의 작업을 읽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천 위에 붙인 종이 그림을 보면 자잘한 알갱이가 연쇄를 이룬 것이 개구리알 같다. 작가의 말 그대로 옮기자면 세포라고 했다. 원자라고 했고, 존재의 최소단위 원소라고 했다. 일종의 모나드며 모듈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최소단위 원소가 모여 풀이 자라고, 나무가 되고, 숲을 일구는, 그런, 밑도 끝도 없이 연이어지는 자연의 생사 순환 원리와 구조를 그린 것으로 보면 되겠다. 알에서 개구리가 유래한 것이니 개구리알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한편으로 그 의미는 자연 대상에만 머물지 않는다. 알갱이 하나하나를 생각의 씨앗이며 기억의 최소단위 원소로 본다면,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무는, 기억에 기억이 연이어지는 생각의, 그리고 기억의 연쇄를 표현한 알레고리가 된다.
천 위에 부착된 종이 그림에는 또 다른 알 수 없는 형상들이 있는데, 지금은 소실되고 없는, 다만 터만 남은, 작가가 유년 시절을 보낸 옛집을 찾아 돌이며 나무며 아직 남아 있는 부수물 같은 오브제의 표면 질감을 떠낸(연필로 프로타주 한) 흔적이고 조각들이라고 했다. 그 종이 조각들은 거치대 위 천에만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전시장의 내외 벽면에도, 전시장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돌출된 유리창에도 붙어있어서 건물 전체를 작업의 한 부분으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느낌이고, 전시장 자체를 작업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느낌이다. 전시를 위한 장소와 작업이 운명을 같이하는 장소 특정적 작업이고, 작업을 공간으로까지 확장한 공간설치작업이라고 해야 할까. 회화를 설치로까지 확장한 것이란 점에서 보면 설치회화라고 해야 할까.
불현듯, 지금까지 오리무중으로만 보였던 작가의 작업이 조금씩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는 느낌이다. 작가의 작업의 실체에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작가는 다름 아닌 기억의 집을 짓고 있었다. 단절하면서 통하는 망사 천이 부각 되고, 희미해지고, 마침내 망각 속으로 사라지고 마는, 때로 왜곡되기조차 하는 기억의 속성을 닮았고, 기억의 양가성을 닮았다. 이처럼 안과 밖이 통해 보이는 망사 천은 기억이 지나가는 통로며, 기억이 기숙하는 몸이다. 그 몸이 마치 자석처럼 기억의 조각들을 불러들이고, 그렇게 기억의 편린들이 그 몸을 숙주 삼아 기생한다. 그렇게 기억이 머문 자리에 봄바람 같은, 살랑, 바람이 분다. 살랑, 이라고는 했지만, 기억을 되불러오는 과정에 회오리도 일었을 것이고, 존재를 온통 흔들어놓는 돌풍도 불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봄바람 같은, 때로 돌풍 같은 바람이 흔들어놓다가 지금은 잠잠해진 기억의 집을 짓고 있었다.
작가는 그 기억의 집을 오랫동안 잊혀진(그 자체 근작의 주제이기도 한), 이라고 부른다. 오랫동안 잊혀진, 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기억의 집을 짓는 행위와 과정은 다만 근작에만 한정된다기보다는 그동안 작가의 전 작업의 이면에서 면면히 작동되고 있었던 경우로 보아야 한다. 비록 매번 그 드러나 보이는 양상은 사뭇 다르지만, 사실은 이처럼 옛집에 대한 기억과 추억을 반추하는 행위가 표현 위로 밀어 올린 다른 지점 지점들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이 샘솟는 원천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므로 옛집에서 채집된 그때의 흔적을 재구성해 보여주는 작가의 작업은 사실은 조각난 기억을 재구성해 온전한 기억을 복원하는 일이고, 파편화된 기억을 재구성해 상실된 정체성을 되찾는 일이다(기억이 곧 정체성일 것이므로).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가 여럿 있지만, 그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잃어버린 원형을 되찾는 일이다. 프로이트는 어른이 유년(유년에 억압된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고 했고, 자크 라캉은 상징계(언어를 사용하는 어른들)가 상상계(무분별한 그러므로 전인적인 유아)에 붙잡혀 있다고 했다. 모더니즘 소설의 효시로 알려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르셀 프루스트 역시 끊임없이 자기를 유년으로 소급시킨다. 결정적으로 칼 융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선 아득한 기억을 집단무의식이라고 했고, 그 집단무의식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곧 반복 상징을 원형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현대인은 그 원형을, 그 원형에 대한 기억을 상실했다. 그러므로 자기를 상실했고, 정체성을 상실했다.
그리고 이런 정체성의 상실이 소외를 부른다. 그렇다면 상실과 소외가 왜 어떻게 현대적 현상인가. 섣부른 답을 하자면, 경제 제일주의 원칙으로 견인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소외는 피할 수 없다. 경제성이 떨어지는 것이면 건물도, 도시도, 사람도, 자연도 다 소외된다. 그렇게 파헤쳐진 채 벌건 속살을 드러낸 산허리에는, 포크레인 소리만 요란한 재개발 현장에는 소외된 사람들, 자연들, 도시들, 건물들의 보이지 않는 혼령들이 부유한다. 그렇게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리어왕의 절규). 여기에 경쟁사회에서 나는 페르소나와 아이덴티티로 분리된다. 사회에 내어준 주체와 그 주체 뒤에 숨은 주체로 분리된다. 그렇게 숨은 주체, 억압된 주체, 소외된 주체는 어디에 있는가(불교에서는 그 주체를 진아, 그러므로 진정한 주체라고 부른다).
도대체 작가가 어떤 종류의 상실감을 앓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아마도 상실된 유년을 혹독하게 앓고 있을 것이라고 다만 추정해볼 뿐이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지극한 상실감이야말로 그가 다름 아닌 현대인임을 증명하는 징후이고 증상인 시대에 작가는 살고 있고, 또한 실제로도 그렇게 상실한 것을 증언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그렇게 내가 상실한 것들, 그러므로 원형은, 그리고 원형적인 기억은 결국 나의 유래 그러므로 존재의 기원이라는 거대 담론에 연결된다. 다시,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은 희미한 기억의 조각들을 끌어모아 집을 짓는, 기억의 집을 짓는, 정체성의 집을 짓는 일로 정의할 수 있겠고, 그 일은 유년을 상실한, 고향을 상실한(특히 게오르그 짐멜과 하이데거에서 고향의 상실은 단순히 지정학적 장소의 상실을 의미하기보다는 존재론적 의미의 상실을 의미한다), 원형을 상실한, 정체성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그렇게 상실된 기억의 조각들이 기생하는 기억의 몸 위로, 정체성의 집 위로 바람이 분다. 그렇게 바람이 불면서, 당신의 마음속, 그러므로 기억 속엔 어떤 바람이 부는지, 작가의 작업은 물어온다.
Song Shin-Kyu's Painting Installation:
Building a House of Memories, Maybe a House of Identity
Kho Chunghwan (art criticism)
Here is an installation in which a crossbar spread out in all directions installed on a vertically upright rod that is equipped with wheels and can move freely. It is a kind of cradle. On the crossbar, a fabric woven from a fine mesh with a transparent back side is hung long from top to bottom, and it flutters in response to the blowing wind. It is like a modified form of a flag, or perhaps an organic structure conceived from a mobile. Partly because of the translucent white mesh, the almost inconspicuous movement of the fabric in response to the wind evokes a dreamy feeling. One comes to think of a white cloth fluttering in the wind, or has a dreamy thought that responds to the wind. One may also think of a dream house and a passageway of memory.
And Song Shin-Kyu painted a picture on a floating white cloth. Then, he cut the drawing paper to paste it to fabric. Although he painted a picture, it is an unknowable amorphous stain created by sprinkling ink rather than a recognizable shape. As the scattered ink splashed out and settle, traces were left, and the ink traces that formed as it spread all over the fabric remained. Is it a painting of marks, traces, and stains? But marks of what? Traces of what? Stains of what? There must be a cause (hidden meaning) that produced the marks, traces, and stains. In order to read the artist's work, the cause, and therefore its hidden meaning, must be uncovered.
And if you look at the paper picture attached on the fabric, the tiny grains form a chain like frog's eggs. According to the artist, each of them is a cell. He called it an atom and the smallest unit of existence. It can be seen as a kind of monad and module. It can be seen as a drawing of the principle and structure of the life-and-death cycle of nature, where the elements of the smallest unit gather together to grow into grass, become trees, and form a forest. Since frogs are derived from eggs, we may to call them frog eggs. On the one hand, its meaning does not stay confined to natural objects. If we regard each grain as the seed of thought and the smallest unit element of memory, it becomes an allegory that expresses the chain of thoughts and memories that endlessly lead to thoughts and memories.
There are other incomprehensible figures in the paper drawing attached to the fabric. They are the traces and fragments of the surface textures of objects the artist retrieved (through frottage by pencil) such as stones, wood, and remnants of the old house where he spent his childhood, which has now disappeared with only the site left. The pieces of paper are not only attached to the fabric on the cradle, but also to the inside and outside walls of the exhibition hall, as well as to the protruding glass window (probably a window gallery?) that gives a clear view of the inside of the exhibition hall. So, it gives the feeling that the whole building is being drawn into a part of the work, and that the exhibition hall itself is included in the artist’s work. Perhaps this is a site-specific work in which the place for the exhibition and the work on display share a common destiny, and perhaps it is a space installation work that extends the work to space. From the perspective that painting has been extended to installation, should it be called painting installation?
Suddenly, it feels like the artist's work, which until now seemed like some inscrutable puzzle, is gradually revealing itself. It seems that we are getting closer to the core of the artist's work. He was building none other than a house of memories. The mesh fabric that connects through disconnection resembles the attributes of memory that emerges, fades, and finally disappears into oblivion, that is sometimes even distorted, and resembles the ambivalence of memory. In this way, the mesh fabric that can be seen through the inside and outside is a passage through which memories pass, and is a body in which memories reside. The body summons fragments of memories like a magnet, and fragments of the memories parasitize the body as a host. A wind like the spring breeze blows softly in the place where the memories stay. I say “softly”, but there must have been a whirlwind in the process of recalling the memories, perhaps a gust of wind that shakes the whole existence to its roots. In this way, the artist was building a house of memories that were once swayed by the spring breeze, sometimes by a gust of wind, and now have calmed down.
He calls the house of memories “the long forgotten” (which itself is also the subject of his recent work). Although “long forgotten”, in fact, the act and process of building a house of memories are not limited to his recent works, but it must be seen that they have been operating behind all of his works. Although the outward appearance is different each time, it can be said that the difference is actually the different points that the act of ruminating on the memories and recollections of the old house has given way to expression. Therefore, they are the source from which the artist's work springs up. Therefore, his work to reconstruct the traces collected from the old house is actually to reconstruct the fragmented memories to restore the intact memory, and to recover the lost identity by reconstructing the fragmented memory (because memory must be identity).
There are many reasons why art exists, but one of the most decisive reasons is to recover the lost original form. Freud said that adults are preoccupied with childhood (the desires repressed in childhood), and Jacques Lacan said that the Symbolic (language-speaking adults) is caught up in the Imaginary (the indiscreet and therefore holistic infant). In In Search of Lost Time, which is known as the first Modernist novel, Marcel Proust also constantly traces himself back to his childhood. Crucially, Carl Jung called the distant memory beyond the individual memory the collective unconscious, and the symbol in which the collective unconscious repeatedly appears, i.e., the symbol of repetition, called the archetype. And modern people have lost the archetype and the memory of the archetype. Therefore, they lost their self and lost their identity.
And this loss of identity leads to alienation. Then, why and how are loss and alienation a modern phenomenon? To give a bit hasty answer, human alienation is unavoidable in a capitalist society driven by the principle that puts the economy first. If the economic value is low, buildings, cities, people, and nature are all alienated. The invisible spirits of marginalized people, nature, cities, and buildings are floating on the hillsides that have been dug up and exposed their bare flesh, and in the redevelopment site noisy with the sound of excavators. I lost myself. Where am I? Who can tell me who I am? (King Lear's scream). Here, in a competitive society, I am divided into persona and identity. Existence is divided into the subject given to society and the subject hidden behind the social subject. Where is the hidden, repressed, and alienated subject? (In Buddhism, the subject is called the Real Self, hence the true subject).
I don't know what kind of sense of loss the artist is suffering from (I can only assume that he is probably suffering from a severe loss of childhood). But what is clear is that this extreme sense of loss is a sign and symptom that proves that he is none other than a modern man, and that he is living in such an era. Also, his work gains universality and sympathy in that he actually testifies to what he has lost. Thus, the things one has lost, hence the archetypes, and the archetypal memories are ultimately linked to the grand discourse of one’s origin and therefore the origin of being. Therefore, the artist's work can be defined as building a house by gathering fragments of faint memories, building a house of memories, and building a house of identity. It gains universality and empathy from people who have lost their childhood, who have lost their homeland, who have lost their archetypes, and who have lost their identity. (Particularly in Georg Simmel and Heidegger, the loss of homeland does not simply mean the loss of a geopolitical place, but rather a loss of ontological meaning.)
The wind blows over the body of the memories where the fragments of the lost memories are parasitic, and the wind blows over the house of identity. As the wind blows like that, the artist's work asks what kind of wind blows in your heart and therefore in your memory.
기억의 집, 그러므로 어쩌면 정체성의 집을 짓는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비평)
여기에 바퀴가 달려있어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세로로 곧추선 봉 위에 사방으로 전개된 가로대가 가설된 설치물이 있다. 일종의 거치대를 생각하면 되겠다. 가로대에는 그 이면이 훤히 비쳐 보이는 고운 망사로 직조된 천이 위에서 아래로 길게 드리워져 있어서 불어오는 바람에 반응하며 하늘거린다. 깃발의 변형된 형태 같기도 하고, 모빌에서 착상된 유기적 구조물 같다고 해야 할까. 반투명한 하얀 망사 때문이기도 하겠고, 바람에 반응하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천의 움직임이 몽환적인 느낌을 준다. 바람에 파르르 떠는 하얀 천이며, 바람결에 반응하는 꿈결 같은 생각을 해 보게 된다. 꿈의 집이며, 기억의 통로 같은 생각을 해 보게도 된다.
그리고 작가는 하늘거리는 하얀 천 위에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그린 종이를 오려 붙였다. 그림을 그렸다고는 하나, 알만한 형상보다는 먹물을 흩뿌려 알 수 없는 비정형의 얼룩을 그렸다. 흩뿌린 먹물이 튀겨나가면서 정착된 흔적을 그리고, 천 위로 한껏 번져나가다가 맺힌 먹물 자국을 그렸다. 자국과 흔적과 얼룩을 그린 그림일까. 그런데, 무슨 자국? 무엇의 흔적? 어떤 얼룩? 자국을, 흔적을, 얼룩을 만든 원인(숨겨진 의미)이 있을 것이다. 그 원인, 그러므로 그 숨겨진 의미를 밝히는 일이 곧 작가의 작업을 읽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천 위에 붙인 종이 그림을 보면 자잘한 알갱이가 연쇄를 이룬 것이 개구리알 같다. 작가의 말 그대로 옮기자면 세포라고 했다. 원자라고 했고, 존재의 최소단위 원소라고 했다. 일종의 모나드며 모듈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최소단위 원소가 모여 풀이 자라고, 나무가 되고, 숲을 일구는, 그런, 밑도 끝도 없이 연이어지는 자연의 생사 순환 원리와 구조를 그린 것으로 보면 되겠다. 알에서 개구리가 유래한 것이니 개구리알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한편으로 그 의미는 자연 대상에만 머물지 않는다. 알갱이 하나하나를 생각의 씨앗이며 기억의 최소단위 원소로 본다면,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무는, 기억에 기억이 연이어지는 생각의, 그리고 기억의 연쇄를 표현한 알레고리가 된다.
천 위에 부착된 종이 그림에는 또 다른 알 수 없는 형상들이 있는데, 지금은 소실되고 없는, 다만 터만 남은, 작가가 유년 시절을 보낸 옛집을 찾아 돌이며 나무며 아직 남아 있는 부수물 같은 오브제의 표면 질감을 떠낸(연필로 프로타주 한) 흔적이고 조각들이라고 했다. 그 종이 조각들은 거치대 위 천에만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전시장의 내외 벽면에도, 전시장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돌출된 유리창에도 붙어있어서 건물 전체를 작업의 한 부분으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느낌이고, 전시장 자체를 작업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느낌이다. 전시를 위한 장소와 작업이 운명을 같이하는 장소 특정적 작업이고, 작업을 공간으로까지 확장한 공간설치작업이라고 해야 할까. 회화를 설치로까지 확장한 것이란 점에서 보면 설치회화라고 해야 할까.
불현듯, 지금까지 오리무중으로만 보였던 작가의 작업이 조금씩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는 느낌이다. 작가의 작업의 실체에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작가는 다름 아닌 기억의 집을 짓고 있었다. 단절하면서 통하는 망사 천이 부각 되고, 희미해지고, 마침내 망각 속으로 사라지고 마는, 때로 왜곡되기조차 하는 기억의 속성을 닮았고, 기억의 양가성을 닮았다. 이처럼 안과 밖이 통해 보이는 망사 천은 기억이 지나가는 통로며, 기억이 기숙하는 몸이다. 그 몸이 마치 자석처럼 기억의 조각들을 불러들이고, 그렇게 기억의 편린들이 그 몸을 숙주 삼아 기생한다. 그렇게 기억이 머문 자리에 봄바람 같은, 살랑, 바람이 분다. 살랑, 이라고는 했지만, 기억을 되불러오는 과정에 회오리도 일었을 것이고, 존재를 온통 흔들어놓는 돌풍도 불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봄바람 같은, 때로 돌풍 같은 바람이 흔들어놓다가 지금은 잠잠해진 기억의 집을 짓고 있었다.
작가는 그 기억의 집을 오랫동안 잊혀진(그 자체 근작의 주제이기도 한), 이라고 부른다. 오랫동안 잊혀진, 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기억의 집을 짓는 행위와 과정은 다만 근작에만 한정된다기보다는 그동안 작가의 전 작업의 이면에서 면면히 작동되고 있었던 경우로 보아야 한다. 비록 매번 그 드러나 보이는 양상은 사뭇 다르지만, 사실은 이처럼 옛집에 대한 기억과 추억을 반추하는 행위가 표현 위로 밀어 올린 다른 지점 지점들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이 샘솟는 원천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므로 옛집에서 채집된 그때의 흔적을 재구성해 보여주는 작가의 작업은 사실은 조각난 기억을 재구성해 온전한 기억을 복원하는 일이고, 파편화된 기억을 재구성해 상실된 정체성을 되찾는 일이다(기억이 곧 정체성일 것이므로).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가 여럿 있지만, 그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잃어버린 원형을 되찾는 일이다. 프로이트는 어른이 유년(유년에 억압된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고 했고, 자크 라캉은 상징계(언어를 사용하는 어른들)가 상상계(무분별한 그러므로 전인적인 유아)에 붙잡혀 있다고 했다. 모더니즘 소설의 효시로 알려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르셀 프루스트 역시 끊임없이 자기를 유년으로 소급시킨다. 결정적으로 칼 융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선 아득한 기억을 집단무의식이라고 했고, 그 집단무의식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곧 반복 상징을 원형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현대인은 그 원형을, 그 원형에 대한 기억을 상실했다. 그러므로 자기를 상실했고, 정체성을 상실했다.
그리고 이런 정체성의 상실이 소외를 부른다. 그렇다면 상실과 소외가 왜 어떻게 현대적 현상인가. 섣부른 답을 하자면, 경제 제일주의 원칙으로 견인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소외는 피할 수 없다. 경제성이 떨어지는 것이면 건물도, 도시도, 사람도, 자연도 다 소외된다. 그렇게 파헤쳐진 채 벌건 속살을 드러낸 산허리에는, 포크레인 소리만 요란한 재개발 현장에는 소외된 사람들, 자연들, 도시들, 건물들의 보이지 않는 혼령들이 부유한다. 그렇게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리어왕의 절규). 여기에 경쟁사회에서 나는 페르소나와 아이덴티티로 분리된다. 사회에 내어준 주체와 그 주체 뒤에 숨은 주체로 분리된다. 그렇게 숨은 주체, 억압된 주체, 소외된 주체는 어디에 있는가(불교에서는 그 주체를 진아, 그러므로 진정한 주체라고 부른다).
도대체 작가가 어떤 종류의 상실감을 앓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아마도 상실된 유년을 혹독하게 앓고 있을 것이라고 다만 추정해볼 뿐이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지극한 상실감이야말로 그가 다름 아닌 현대인임을 증명하는 징후이고 증상인 시대에 작가는 살고 있고, 또한 실제로도 그렇게 상실한 것을 증언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그렇게 내가 상실한 것들, 그러므로 원형은, 그리고 원형적인 기억은 결국 나의 유래 그러므로 존재의 기원이라는 거대 담론에 연결된다. 다시,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은 희미한 기억의 조각들을 끌어모아 집을 짓는, 기억의 집을 짓는, 정체성의 집을 짓는 일로 정의할 수 있겠고, 그 일은 유년을 상실한, 고향을 상실한(특히 게오르그 짐멜과 하이데거에서 고향의 상실은 단순히 지정학적 장소의 상실을 의미하기보다는 존재론적 의미의 상실을 의미한다), 원형을 상실한, 정체성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그렇게 상실된 기억의 조각들이 기생하는 기억의 몸 위로, 정체성의 집 위로 바람이 분다. 그렇게 바람이 불면서, 당신의 마음속, 그러므로 기억 속엔 어떤 바람이 부는지, 작가의 작업은 물어온다.
Song Shin-Kyu's Painting Installation:
Building a House of Memories, Maybe a House of Identity
Kho Chunghwan (art criticism)
Here is an installation in which a crossbar spread out in all directions installed on a vertically upright rod that is equipped with wheels and can move freely. It is a kind of cradle. On the crossbar, a fabric woven from a fine mesh with a transparent back side is hung long from top to bottom, and it flutters in response to the blowing wind. It is like a modified form of a flag, or perhaps an organic structure conceived from a mobile. Partly because of the translucent white mesh, the almost inconspicuous movement of the fabric in response to the wind evokes a dreamy feeling. One comes to think of a white cloth fluttering in the wind, or has a dreamy thought that responds to the wind. One may also think of a dream house and a passageway of memory.
And Song Shin-Kyu painted a picture on a floating white cloth. Then, he cut the drawing paper to paste it to fabric. Although he painted a picture, it is an unknowable amorphous stain created by sprinkling ink rather than a recognizable shape. As the scattered ink splashed out and settle, traces were left, and the ink traces that formed as it spread all over the fabric remained. Is it a painting of marks, traces, and stains? But marks of what? Traces of what? Stains of what? There must be a cause (hidden meaning) that produced the marks, traces, and stains. In order to read the artist's work, the cause, and therefore its hidden meaning, must be uncovered.
And if you look at the paper picture attached on the fabric, the tiny grains form a chain like frog's eggs. According to the artist, each of them is a cell. He called it an atom and the smallest unit of existence. It can be seen as a kind of monad and module. It can be seen as a drawing of the principle and structure of the life-and-death cycle of nature, where the elements of the smallest unit gather together to grow into grass, become trees, and form a forest. Since frogs are derived from eggs, we may to call them frog eggs. On the one hand, its meaning does not stay confined to natural objects. If we regard each grain as the seed of thought and the smallest unit element of memory, it becomes an allegory that expresses the chain of thoughts and memories that endlessly lead to thoughts and memories.
There are other incomprehensible figures in the paper drawing attached to the fabric. They are the traces and fragments of the surface textures of objects the artist retrieved (through frottage by pencil) such as stones, wood, and remnants of the old house where he spent his childhood, which has now disappeared with only the site left. The pieces of paper are not only attached to the fabric on the cradle, but also to the inside and outside walls of the exhibition hall, as well as to the protruding glass window (probably a window gallery?) that gives a clear view of the inside of the exhibition hall. So, it gives the feeling that the whole building is being drawn into a part of the work, and that the exhibition hall itself is included in the artist’s work. Perhaps this is a site-specific work in which the place for the exhibition and the work on display share a common destiny, and perhaps it is a space installation work that extends the work to space. From the perspective that painting has been extended to installation, should it be called painting installation?
Suddenly, it feels like the artist's work, which until now seemed like some inscrutable puzzle, is gradually revealing itself. It seems that we are getting closer to the core of the artist's work. He was building none other than a house of memories. The mesh fabric that connects through disconnection resembles the attributes of memory that emerges, fades, and finally disappears into oblivion, that is sometimes even distorted, and resembles the ambivalence of memory. In this way, the mesh fabric that can be seen through the inside and outside is a passage through which memories pass, and is a body in which memories reside. The body summons fragments of memories like a magnet, and fragments of the memories parasitize the body as a host. A wind like the spring breeze blows softly in the place where the memories stay. I say “softly”, but there must have been a whirlwind in the process of recalling the memories, perhaps a gust of wind that shakes the whole existence to its roots. In this way, the artist was building a house of memories that were once swayed by the spring breeze, sometimes by a gust of wind, and now have calmed down.
He calls the house of memories “the long forgotten” (which itself is also the subject of his recent work). Although “long forgotten”, in fact, the act and process of building a house of memories are not limited to his recent works, but it must be seen that they have been operating behind all of his works. Although the outward appearance is different each time, it can be said that the difference is actually the different points that the act of ruminating on the memories and recollections of the old house has given way to expression. Therefore, they are the source from which the artist's work springs up. Therefore, his work to reconstruct the traces collected from the old house is actually to reconstruct the fragmented memories to restore the intact memory, and to recover the lost identity by reconstructing the fragmented memory (because memory must be identity).
There are many reasons why art exists, but one of the most decisive reasons is to recover the lost original form. Freud said that adults are preoccupied with childhood (the desires repressed in childhood), and Jacques Lacan said that the Symbolic (language-speaking adults) is caught up in the Imaginary (the indiscreet and therefore holistic infant). In In Search of Lost Time, which is known as the first Modernist novel, Marcel Proust also constantly traces himself back to his childhood. Crucially, Carl Jung called the distant memory beyond the individual memory the collective unconscious, and the symbol in which the collective unconscious repeatedly appears, i.e., the symbol of repetition, called the archetype. And modern people have lost the archetype and the memory of the archetype. Therefore, they lost their self and lost their identity.
And this loss of identity leads to alienation. Then, why and how are loss and alienation a modern phenomenon? To give a bit hasty answer, human alienation is unavoidable in a capitalist society driven by the principle that puts the economy first. If the economic value is low, buildings, cities, people, and nature are all alienated. The invisible spirits of marginalized people, nature, cities, and buildings are floating on the hillsides that have been dug up and exposed their bare flesh, and in the redevelopment site noisy with the sound of excavators. I lost myself. Where am I? Who can tell me who I am? (King Lear's scream). Here, in a competitive society, I am divided into persona and identity. Existence is divided into the subject given to society and the subject hidden behind the social subject. Where is the hidden, repressed, and alienated subject? (In Buddhism, the subject is called the Real Self, hence the true subject).
I don't know what kind of sense of loss the artist is suffering from (I can only assume that he is probably suffering from a severe loss of childhood). But what is clear is that this extreme sense of loss is a sign and symptom that proves that he is none other than a modern man, and that he is living in such an era. Also, his work gains universality and sympathy in that he actually testifies to what he has lost. Thus, the things one has lost, hence the archetypes, and the archetypal memories are ultimately linked to the grand discourse of one’s origin and therefore the origin of being. Therefore, the artist's work can be defined as building a house by gathering fragments of faint memories, building a house of memories, and building a house of identity. It gains universality and empathy from people who have lost their childhood, who have lost their homeland, who have lost their archetypes, and who have lost their identity. (Particularly in Georg Simmel and Heidegger, the loss of homeland does not simply mean the loss of a geopolitical place, but rather a loss of ontological meaning.)
The wind blows over the body of the memories where the fragments of the lost memories are parasitic, and the wind blows over the house of identity. As the wind blows like that, the artist's work asks what kind of wind blows in your heart and therefore in your mem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