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업은 돌아갈 곳 없는 집의 '빈터'를 닮은 사라진 장소에 의미를 둔다. 지금까지 나의 유년 시절 추억을 땅의 기억이라는 소재로 캔버스 위에서 나의 뿌리와 주거지를 찾았다면, 이번에는 육지와는 조금 다른 환경을 제공해줄 땅을 찾아 작업을 확장할 기회를 만들고 싶었다. 나와 연결고리가 없는 제주라는 섬으로부터 과거의 뿌리 위에 새로이 피어나는 것에 의미를 두어 나에게 물을 주고자 했다.
물은 외부의 영향이자 땅속의 길이다. 속으로 배어들면 단단한 겹겹의 층을 형성하고 더 많은 층을 쌓아가며 시간을 나아간다. 시간은 물이 만들어낸 길을 타고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나는 10개월간의 제주도에서 머물렀다. 처음에 제주라는 땅을 이해하기 위해 과거의 기억을 품은 여러 장소를 답사하며 역사의 이미지, 잊힌 사물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지금의 제주인들이 생활하는 일상의 공간을 거닐며 현재를 바라봤다. 지나간 역사와 지금의 삶 속에는 미래를 위한 발전, 관광의 요소들이 곳곳에 보였다. 머무는 시간이 끝나갈수록 나는 언젠가 지금의 기억을 그리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땅에서 사물을 체득하는 것은 오랜 기억들이 마치 곶(串)에 감춰져 잠을 자고 있던 ‘사실’을 들춰보는 것과 같다. 들춰낸 죽음이나 슬픔을 통해 아픈 현실을 버려둔 이 땅의 외면된 역사를 사진이라는 매체를 활용해 수집된 이미지로 재현한다. 어쩌면 투사로 대상을 관찰할 때,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이미지 안에는 오랜 풍파에 깎여나간 사물의 표면과 층 위로 쌓아 올라간 자연의 변화된 형상, 특정한 휴양지의 환상에서 만들어진 제조자들과 같은 시공간의 포착으로 변화를 겪고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들을 담고자 했다. 일기형식으로 풀어낸 작업은 지내 온 생각을 글·그림으로 제주에 나의 오름을 만들어가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누군가에게는 휴양지의 땅이었고 또 다른 이에게는 개척지가 되고, 본래 원주민에게는 오랜 과거 기억을 담고 있는 각자의 관계들이 불규칙하게 쌓여가는 현재의 모습을 거닐며 기록했다. 제주에는 이렇듯 제각기 상황들, 입장들이 모여 어우러지고 있는 듯 보인다. 이 모든 작업 과정은 작품 안의 이미지를 떠나 제주를 거쳐 다시 나의 터전으로 돌아가기까지 변화의 자양분이 되어 나의 모습을 대변해준다.